“너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어. 우리는 모두 너를 기다리고 있을거야!” 호랑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처럼 우리는 ‘단순히 먹고 자라는 것 이상의 무엇’을 원하며 살아간다. 그 이상을 찾아가기 위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느냐의 문제이다.단순히 앞만 보고 남들이 하는대로, 남들의 방향대로 따라가는 곳에서 아무 것도 없음을 트리나 폴러스는 그녀의 책 “꽃들에게 희망을” 에서 이야기한다. 호랑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처럼 그 이상의 무엇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환경에 의해서 캐나다에 이민을 갔지만 항상 한국을 그리워하며 자신과의 싸움으로 3650일 동안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있었던 작가가 있다. 이제는 그녀가 변태를 해서 날개짓을 하려고 한다. 최마록 작가. 그녀는 그림이 전부라고 생각한 화가였다. 그런 그녀가 캐나다 생활동안 그림보다는 밥, 빨래를 하는 익숙하지 않은 생활에 재미를 느꼈다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어디 있느냐 고민하게 되고 그때부터 ‘cocoon'시리즈를 하게 된다. 그녀도 그렇게 오랫동안 ’cocoon'작업을 하게 될지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 3650일이 된 것이다.그런 날 우연한 기회에 친구의 부탁으로 cocoon작업을 다른 작품 위에 붙였다.
주말 예배를 마치고 아버지의 산소를 찾았다.내 삶에서 나를 아프게, 더 강하게 성장하게 해준 나의 열등감의 덩어리인 나의 아버지. 이젠 몇 평 남짓한 자연에서 본다.과거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내 삶의 마음 한켠에 간직한 애증의 감정도 훌훌 털어버린지 오래인데.아버지도 이젠 삶의 무게를 벗어던질 수 있는 용기가 계시리라.아니 이미 벗어던졌으리라. 몇 평의 공간에서 세월과 함께...... 나의 열등감과 삶의 무게를 받아들였다고 자부하며 살아온 삶에 또 다시 삶의 태풍에 휩싸이면서 이제 내 삶의 갈등도 끝인 줄 알았던 나라는 존재를, 마흔이 넘어 쉰이 다가오기 전 온전히 내 삶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참 오래도 걸렸다.논어에 이르기를 마흔은 불혹으로 세상 일에 미혹되지 아니하고, 쉰은 지천명이라 하였는데... 삶을 받아들이는 나이라고 해야 할까?쉰이 되기 전 삶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내 삶을 사랑한다면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이렇게 마음 한켠 겹겹이 쌓여온 삶의 무게에 무엇이 중한디를 외쳐보면서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마는데, 전해지는 것은 사유뿐이라고 말한 현대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 그를 만났다.설날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르 코르뷔지에를 만났다. 그의 영혼이 담
공공미술의 장소는 길이다.즉 사람이 다니는, 넓게는 소통하는 공간이다. 공공미술은 미술이나 예술의 장르를 통해 삶의 공간을 만들며 나아가 사람을 만든다. 작년 필자가 공공미술에 대한 작업을 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접한 공공미술에 대한 중요한 포인트이다. 여러 권의 책을 읽고 기록한 내용들을 다시 한번 되집어 본다.『왜 공공미술인가』(2006)의 저자인 박상철은 그의 책에서 “공간은 단순히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생명들로 채워져 꽃피는 삶의 매트릭스다.”라고 하였다.이는 사용미학인 공공미술이 행해지는 정책이 엘리트 미술가를 위한 정책이 아니라 시민들이 문화예술을 실제로 사용하고 전유할 수 있는 사용환경을 제대로 구성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사용미학은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바로 잡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예술같은 삶을 사는 새로운 시대의 미학이다.즉 현대사회에서 공공미술은 사용미학의 관점으로 볼 때 엘리트 미술가들의 작품이 아니라 시민들과 소통하고 나누고 전유할 수 있는 “나도 예술가”를 지향하는 미술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많이 보는 공공미술의 하나로 벽화가 있다.공공미술로서 벽화를 제작할 때 가장 중요한 요인은 벽화가 그려지는 공간에…
'소멸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포항시립미술관에서는 <디지털 산수인>과 <추당 박영달 회고전. 사진예술과 휴머니즘>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회의 특성을 보면 자연과 사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하나는 현대 디지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한 작업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박영달 선생의 사진으로 보는 1950년에서 70년까지 우리 주변의 살아왔던 모습을 볼 수 있다. 수많은 예술에 대한 의견이 있지만 박영달 선생은“무언가 자기의 느낌, 감정 이것이 표현이 되어서 남에게 전달되어야만 그것이 예술”이라 고 한다.진정 디지털 시대에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이라는 것이 존재할까?분명 작가의 작업에는 자기의 느낌, 감정이 표현되어진다. 하지만 느낌, 감정이 절제되거나 지나치게 과도하게 표현되어지는 현대사회에서 평론가에 의해 예술이라는 이름하에 관람객들에게 전해진다.시간이 지나면서 소멸하지 않은 게 없다. 그래서 예술은 아름다운게 아닐까?예술이 무엇인가 알기 위해 “소멸”이라는 주제를 던져본다. <디지털 산수인>에서 현대미술은 작가가 현실을 새로이 창작하는 작업들이 많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를 듣거나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 예술은 그저 허상
자녀를 양육하면서 많이 가지게 되는 생각이 쟤는 나랑 닮았다, 배우자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심리를 알기 위해서 심리검사를 하거나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거나 자녀양육에 대한 책을 구입해서 읽는 경우가 많다.하지만 정작 부모 자신이 자신에 대해 알려고 하는 면은 약하다. 오늘은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나아가 자녀와의 소통이나 심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기에 ‘셀프 이미지’를 알아보려고 한다.우리는 저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모습을 중요시하며 살아간다. 호감주는 외모를 통하여 남보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내면의 실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맥스웰 몰츠는 모든 사람은 셀프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내부에 있는 정신적 청사진이나 그림을 말한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의 성공과 실패가 전적으로 셀프 이미지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즉 외부적으로 보여지고자 하는 셀프이미지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갖고 있는 각자의 긍정적인 셀프이미지 인 것이다. 자신의 감정, 행동, 능력, 활동은 셀프 이미지와 정확하게 일치된다고 한다. 셀프 이미지에…
이미 철 지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지난 3월 우리는 이세돌과 알파고라는 인공지능과의 바둑 대결에 온 이목을 집중한 적이 있다. 나처럼 평소에 바둑을 즐기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바둑의 “바”자도 모르는 사람조차 TV에 눈을 응시한 채 몇 시간을 지켜봤다고 한다. 그저 건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졸이면서. 왜?세계 최고의 한국 기사가, 세계 최초로 “알파고”라는 인공지능을 상대로, 그간 컴퓨터가 정복할 수 없다고 굳게 믿었던 바둑의 승부를 겨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이 세기의 대결 이후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가 인공지능의 한계가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호기심으로 들끓었다. 기대감 혹은 두려움을 갈무리한 채! 글로벌 시대에 걸맞게 전 지구가 저성장 혹은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저출산, 청년실업, 초고령화사회 등으로 더 심각하다. 그래선지 부모들은 한결같이 직업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의대, 교대, 간호대에 자녀를 보내려고 안간힘이다. 그러나! 지금 인기를 끌고 있는 직업들이 10년, 20년 지난 뒤에도 그 인기를 유지할 있을까? 불철주야 공부하고 대학교 졸업하고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면 미래가 보장될까? 세상이 상전벽해…
‘정원’의 사전적 의미는 미관이나 위락 또는 실용을 목적으로, 주로 주거 주위에 수목을 심든가, 또는 이 밖에 특별히 조경이 된 토지를 뜻한다.최초의 정원은 자연 안에 울타리 처진 땅을 지칭하는 것으로 정원이란 독일어 단어 Garten에서 파생된 울타리 처진 땅을 의미한다. 한편으론 울타리를 두른 땅이란 페르시아어 ‘pairidaeza'가 파라다이스가 되었다. 즉 거주 공간에 자연을 모방하기 위해 나무와 꽃, 분수를 만들면서 정원은 시작되었는데 이것을 파라다이스라고 본다면 정원은 낙원이라는 의미도 있겠다.그래서 정원을 가꾼다는 것은 나의 소일거리로 하는 취미일 수도 있으나 아름답게 가꾼 정원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겠다는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과 낙원을 지향하는 행복한 순간을 느끼기 위한 노작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헤르만 헤세는 정원 일을 하면서 자연과 인생의 비밀을 성찰하는 작가이다.그의 저서 『정원 일의 즐거움』에서 작가는 정원을 통해 배움을 찾는다.‘산과 강, 나무와 잎사귀, 뿌리와 꽃, 이 모든 자연의 형상을 우리 안에 그 원형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영원성을 지닌 영혼, 우리가 비록 그 본질을 알지 못하나 사랑의 힘, 창조의 힘으로 느끼는 그 영혼에서…
누구나 꿈(夢)을 꾼다.‘꿈은 콤플렉스로 얽힌 삶의 매듭을 푸는데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하며, 창조성과 부활의 힘, 정신력과 지혜의 풍부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우리 내면의 그림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에게 말을 꺼내려고 하지만 우리는 의식의 과제에 치인 나머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밤을 틈타 찾아온다.’ 라고 로버트 존슨의『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에서 말한다.우리가 꾸는 꿈 이미지는 바로 원형적 에너지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나’라는 존재가 의미를 실현시켜 가기 못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하지만 의식은 올라올 준비가 다 됐는데도 거부당한 그림자들은 반드시 문제를 일으킨다. 즉 몸의 증상이나 생각, 꿈들은 모두 심오한 자기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다. 이러한 이미지에 나타나는 어두운 그림자는 인격의 성장과 발달에 유용한 수단이지만 자아의 열등한 측면이다. 그래서 그림자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이를 나의 일상에서 어떻게 다루느냐가 관건이다. 그림자가 ‘의식되어 햇빛을 보는 순간, 그 내용들은 곧 창조적이며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그들의 꿈에서 그림자를 찾기가 힘들다.어떻게 하면 꿈에서 그림자를 찾
이철환 작가의 <위로>는 주인공 파란 나비 피터의 자아찾기 여행을 통해 위로가 무엇인지 나아가 우리 시대에 위로를 해주고 있다. 이는 또한 self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의 과정이기도 하다.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에서도 <위로>처럼 존재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다.왜 ‘꽃들에게 희망을’이라고 했을까?이 책은 호랑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한 과정을 통해 아름다운 나비가 될 자질과 용기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희망을 주는 이야기이다.나비는 4단계의 완전 변태과정을 거친다. 알에서 애벌레,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번데기에서 나비인 성충이 되기까지 그 단계마다 우연히 되는 과정은 없음을 보여준다.애벌레에서 그냥 나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비가 되기 위한 과정에서 수많은 유혹이 따른다.호랑 애벌레는 노랑 애벌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둥의 꼭대기로 올라 도달하지만 그 곳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에 대한 사실을 조용히, 입 다물고 묵인하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무 것도 없는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길은 타인을 짓밟고 올라가지만 아무런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이철환 작가의 <위로>를 읽으며 파란 나비 피터를 통해서 자아 찾기를 따라 나선다.자아 찾기란 내면의 깊은 곳으로 떠나야만 볼 수 있다. 즉, 내면의 깊이를 먼저 알아야 한다.내면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볼 수 있는가?작가의 글에서 “높은 곳보다 낮은 곳에서 더 많은 걸 볼 수 있을지도 몰라. 네가 진정으로 높이를 갖고 싶다면 깊이에 대해 먼저 고민해야 돼. 깊이를 가지면 높이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거니까. 하늘을 행군하기 위해서 나무들은 맨손 맨발로 어두운 땅 속을 뚫어야 하거든. 깊이가 없는 높이는 높이가 아니야. 깊이가 없는 높이는 바람에 금세 쓰러지니까.”더불어 깊이를 가지는 방법으로 “깊이를 갖는다는 건, 꽃을 피울 수 있는 당장의 씨앗을 열망하지 않고, 씨앗을 품을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놓는거야. 토양만 있다면 꽃은 언제든지 피어날 수 있거든......, 깊이를 갖는다는 건 자신의 가능성을 긍정하며 어둠의 시간을 견디겠다는 뜻이니까......,”라고 말한다.이철환 작가의 글은 저자에게 삶에서 나를 찾기가 필요할 때 자각을 하게 하거나 거창하게는 자기분석을 하게 한다. 이것은 작가가 아픔을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